항목 ID | GC01900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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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蓮河里 |
영어음역 | Yeonha-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유병태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저전리(楮田里)와 우성리(于城里)의 일부를 병합하고 연화동과 하남의 첫자를 따서 연하리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국망산과 보련산 등의 높은 산 아래에 좁게 펼쳐진 계곡에 아주신씨, 여양진씨 등이 들어와 세거하였다. 1760년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원현조에 따르면 노은면의 보련동리(寶蓮洞里)로 충주 관아로부터 50리 거리에 있었으며, 가구 수는 69호에 239명(남자 140, 여자 199)이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입장(立場), 연화동(蓮花洞), 보련동(寶蓮洞), 하남(河南) 등의 마을이 있었다. 1916년에 가신동에서 연하리 입장으로 면사무소를 이전하였다.
처음에는 하남리, 보련골, 연화동 등의 마을이 농사를 주로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보련산에 금광이 태창광산에 의해 개발되어 한때는 연간 금생산량이 180㎏이었고 노무자만도 181명이 근무하였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채굴과 금방앗간을 위한 전기가 일찍부터 들어왔으며, 금융조합도 들어왔다. 한때 광부들과 장사꾼, 지역 주민들이 장날이면 북적거렸고 3일, 8일에 장이 서서 입장이라 하였다. 입장은 원래 주막이었으나 장이 서면서 지금의 입장이라는 명칭을 얻었던 것이다.
[자연환경]
북쪽으로는 국망산[770.3m]이, 동북쪽으로는 보련산[764.9m]이 병풍을 드리우고 있으며, 이들 산 중간으로 국가지원지방도 49호선을 따라 하남현(河南峴)[310m]을 넘으면 앙성면으로 연결된다. 동쪽으로는 신효리, 서쪽으로는 문성리와 각각 접하며 남쪽으로는 자주봉산(自主峰山)[483.6m]이 주덕읍, 신니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앙성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입장, 보련, 연화 등의 마을 앞에는 넓은 평야 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하남천과 보련천이 한포천(漢浦川)에 유입되면서 이 평야 지대를 지나고 있다. 남쪽으로는 중부내륙고속국도가 동서로 관통하며 그 뒤로는 자주봉(自主峰)[483.6m]이 주덕읍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1944년 갑신년 장마로 농경지가 유실되어 불모지였으나, 1970년대에 독지가 진용학(陳庸鶴)이 연화동 앞에 양수 시설을 만들어 개답(開畓)을 하여 넓은 들이 만들어 졌다.
[현황]
2008년 1월 1일 현재 면적은 8.9㎢이며, 총 244세대에 645명(남 331, 여 314)의 주민이 살고 있다. 농가는 138가구이고 비농가는 106가구이며, 경지 면적은 밭이 0.60㎢, 논이 0.61㎢, 과수원이 0.09㎢이다. 연하리는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도로가 나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자연 마을로는 연하1리에 입장·연화동이, 연하2리에 상입장·보련골이, 연하3리에 가마골·하남이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쌀, 보리, 콩 등을 재배하며, 일제강점기 이후에 담배 농사를 지어 소득을 올렸으나, 현재는 찹쌀을 브랜드화하여 노은찹쌀이 생산되고 있다. 이외에 채소, 배, 복숭아 과수원이 늘어나고 있다.
주요 기관으로는 노은면사무소, 노은초등학교, 노은지서, 노은우체국, 노은농업협동조합, 노은보건지소 등이 있다. 종교 단체로는 보련사, 노은장로교회 등이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보련산성, 보련사지, 진용학 공적비, 진상흥 기공비, 신재운 효자기행비, 시인 신경림생가, 아주신씨 봉조각, 하남이 야철지, 가마골 분청사기 가마 터, 연하리 분청사기요지, 보련골 옹기 가마 터 등이 있다. 특히 보련사지는 고려 때 급전(給田)한 거찰 터로서 이곳에서 불상으로 추정되는 건흥 5년이라고 쓰인 금동불광배가 출토되었으며, 1967년에도 금동불이 밭에서 발견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연하리 하남 산신제와 연하리 보련골 산신제가 거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