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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 충청북도 충주시 교현동 지역의 옛 이름으로 추정되고 있는 지역. 충주시 교현동에 속하며, 북문이 있었던 곳은 충주여자중학교의 북쪽 사거리 주변으로 추정되며, 그 북쪽으로 공설운동장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다. 『예성춘추(蘂城春秋)』 41쪽의 「고북문」조에, “읍북 주봉 동측가도를 고래로부터 고북문거리라고 하는데, 연대는 미상이나 전설에 의하면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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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철산지. 곡나철산은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백제의 철산지이다. 곡나철산이 언급되는 부분의 신빙성이나 성격 등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을 가지고 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지명 고증에 대한 연구들이 이미 진행되었다. 일본 측 사료에 등장하는 만큼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먼저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후 한국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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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던 고구려의 지명. 국원성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고구려가 한반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확보한 거점 지역인 오늘날 충주 지역에 성을 쌓고 붙인 이름이다. 이 지역은 신라가 차지한 후 진흥왕 대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 경덕왕 대에는 중원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태조에 의해 충주라는 명칭으로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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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옛 이름. 『고려사(高麗史)』에는 충주의 다른 이름으로 대원(大原)과 예성(蘂城)이 등장한다. 그 중 대원은 고려 성종이 정한 별호라고 명기하고 있기 때문에, 성종 이후부터 충주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충주를 대원이라 부른 사례가 너무 단편적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유래를 확인하기는 어렵고, 다만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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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의 옛 이름. 목계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형성된 촌락이 아니고, 목계가 가지는 자연 지리적 이점에 의하여 조선 후기인 1750년 이전에 이미 내륙의 상항(商港)으로 강을 내려오는 어염선이 정박하며 세를 내는 곳이 되었다. 한강의 가항구간 중 중간에 위치하여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집산될 수 있는 지점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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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명칭. ‘충주’라는 지명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다. 그 이전에는 ‘국원’과 ‘중원’이 공식 명칭으로서 삼국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충주의 연혁을 다루고 있는 주요 사료들에는 삼국시대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설치한 국원성을 언급하면서 공통적으로 “혹은 미을성이라고 한다.”는 점을 주석으로 기재하고 있다. 즉 고구려에 의해 국원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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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충청북도 충주 탄금대가 있던 지역의 이름. 양진명소는 탄금대 북쪽 강가에 임한 금휴포구에 있었다. 한때는 신립 장군의 사당이라고도 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 봄·가을로 나라에서 향을 내리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제신(祭神)인 오룡(五龍)에게 제사하던 별신굿놀이로 ‘양진명소 오룡굿’이 전해지고 있다. 근년에 이 오룡굿을 문화제 행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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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충청북도 충주 탄금대가 있던 지역의 이름.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 북쪽 강가에 임한 금휴포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고려시대부터 봄·가을로 지방관에 명하여 제사를 지냈다. 양진명소(楊津溟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탄금대 금휴포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주목조에 “춘추로 소재관에 명하여 제사를 지냈다(楊津衍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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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의 별칭. 『고려사(高麗史)』에는 충주의 다른 이름으로 예성(蘂城)과 대원(大原)이 등장한다. 그 중 예성은 대몽항쟁의 공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별호인데, 이후부터 충주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별칭으로 불렸다. 현재까지도 충주의 학교·단체 등의 이름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고려사』에는 예성에 “1255년(고종 42)에 다인철소(多仁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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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성(城)의 하나. 충주에 있는 충주 고구려비에 이름이 전하는 우벌성은 5세기 고구려가 충주 지역까지 장악한 후 쌓았던 성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충주 고구려비 외에 다른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그 실체를 확인할 만한 유적이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벌성과 관련한 정보는 매우 불확실한 형편이다. 비문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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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과 경상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던 고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울과 동래(부산) 사이를 연결하는 교통로였고,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조령은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이 있으며, 이들 관문과 성벽은 1708년(숙종 34)에 축조되었다. 이 중 제3관문을 지나면 경상북도이다. 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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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1995년까지 읍의 외곽 지역 12개 면을 관할했던 행정구역. 중원군의 인구는 충주시와 분리된 1년 후인 1957년 12월 현재 113,114명이었으며, 1966년에는 153,487명으로 충청북도 내에서도 으뜸가는 거대한 군이었다. 그러나 1993년 말 현재는 주민등록상 18,951가구에 67,749명(남 34,531, 여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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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의 별칭. 고려시대 금석문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와 사자빈신사지석탑(師子頻迅寺址石塔)에는 충주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중주(中州)’가 등장한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 등의 역사서에는 중주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인 명칭이라기보다는 민간에서 사용한 별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州)’는 신라 이래의 지방 행정구역 명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