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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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州-歷史-野外博物館-中央公園 |
영어의미역 | Jungang Park, Open-air Museum where the history of Cheongju is aliv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석린 |
[정의]
충청북도(忠淸北道) 청주시(淸州市) 상당구(上堂區) 남문로2가(南門路2街)에 있는 면적 24,800평 규모의 공원.
[개관]
예로부터 청주는 지세를 따졌을 때 무심천(無心川) 위에 떠있는 배의 형상이라고 해서 주성(舟城)이라고 했다. 청주의 한복판이라 할 남문로 2가에 서있는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鐵幢竿)은 배를 안정시키고자 세운 돛대라고 전해진다. 중앙공원(中央公園)은 청주시의 중앙에 있다고 하여 중앙공원(中央公園)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忠淸道兵馬節度使營)이 있었고 1908년 이후에는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해온 충청북도 도청이 있었다. 1937년 인구 6만명일 때 도청이 현재의 문화동(文化洞) 청사로 이전하면서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1986년 장소의 협소함으로 인해 24,800평으로 확장·조성되었다.
중앙공원(中央公園)은 청주시민의 휴식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시민을 위한 각종 음악회와 발표회도 자주 열림으로써 문화공간으로서도 활용되고 있다. 공원 안에는 1,000년 된 은행나무인 압각수(鴨脚樹)[충북기념물 제5호]와 목조(木造) 2층 누각(樓閣)인 병마절도사영문(兵馬節度使營門)[충북유형문화재 제15호], 조헌(趙憲)[1544~1592]전장기적비(趙憲戰場紀蹟碑, 충북유형문화재 제136호), 척화비(斥和碑, 충북기념물 23) 등 유적이 많다.
[중앙공원과 압각수]
중앙공원(中央公園) 한 가운데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樹齡) 1000여년의 큰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그 잎이 오리의 발을 닮았다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 하며 공손수(公孫樹)라고도 불린다. 이 일대는 고려시대 이후 관아가 있던 곳으로 지금 남아 있는 압각수 외에도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이 나무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와 관련해서 『고려사(高麗史)』,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택리지(擇里志)』 등 고문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와 그 일당이 역성혁명을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에 ‘이초(李初)의 옥사(彛初獄事)’란 큰 사건이 있었다. 윤이(尹彛), 이초 두 사람이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명나라 세력을 빌어 이성계 일파를 타도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건이었다. 윤이는 자신을 파평군(坡平君), 이초는 중랑장(中郞將)이라 사칭하고 명나라에 들어가 ‘이성계가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으나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다. 공양왕이 이성계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장차 명나라를 치려 하는 것을 이색(李穡)[1328~1396] 등이 반대하자 이색, 조민수 등을 살해하고 우현옥, 정지 등을 유배하였다. 유배된 재상들이 자기들을 보내었으니 군사를 일으켜 이성계 일파를 토벌해야 한다’ 고 무고했다. 이 무고는 명에 사신으로 간 순안군(順安君) 방(昉)과 동지밀직사(同知密直司) 조반(趙畔)을 통해 본국에 알려져 큰 옥사가 일어났다. 우현보 등은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고 이색, 이림(李琳), 정지, 이숭인, 권근(權近) 등은 청주옥에 갇혔다. 윤유린, 최공철, 홍인계는 옥사하여 효수(梟首) 되었으나, 청주옥에 갇힌 사람들은 불복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를 보내어 이들을 문초하였다. 이때 큰 폭우가 쏟아져 성안에 물이 차고 큰 홍수가 났다. 옥리와 죄수들은 근처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그때 죄수들이 올라가서 목숨을 구한 나무가 현재의 중앙공원 내에 있는 압각수라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공민왕(恭愍王) 때의 일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공양왕 2년, 5월 을사(乙巳)일 임이 확인된다.
이 기록의 나무가 지금의 압각수라고 고증(考證)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실여부를 떠나 청주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이야기를 입으로 전승(傳承)하며 의심 없이 진실로 믿고 있다.
[청주의 비림 중앙공원]
중앙공원(中央公園)은 청주의 비림(碑林)이다. 비림이란 중국의 고도, 서안에 있는 것을 일컫는데 고대 중국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비문을 모아두었다. 비(碑)가 숲(林)을 이루고 있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탈환의 주역이였던 중봉(重峰) 조헌의 기적비(紀蹟碑)를 비롯하여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1592]의 기적비, 화천당(花遷堂) 박춘무(朴春茂)[1544~1611] 선생의 기적비가 오른쪽 편에 줄지어 있다.
이외에도 목사 서유민 선정비(牧使 徐有民 善政碑), 김효성(金孝誠)[1585~1651] 청백 선정비(金孝誠 淸白 善政碑)가 공원 화단 오른편에 있고 판독이 불가능한 선정비도 한 기 있다. 거북좌대 위에 세운 김효성 선정비는 ‘이수’까지 갖추었다. 비신위에 용머리 장식이 있으면 ‘이수’라고 하고 용머리장식이 아닌 덮개돌 형식이면 개석(蓋石), 비갓, 갓돌 등으로 불린다. 선정비의 이수 전 후면에는 용조각이 현란하다.
담장 가까이에는 돌거북 좌대 한 기가 있는데 중앙공원(中央公園) 후문 일대의 하수도 공사도중 나온 것으로 보인다. 돌거북의 형태는 희미하나 비신(碑身)을 세웠던 흔적은 분명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중 하나는 귀부(龜趺, 머리부분)가 약간 고개를 틀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국운이 한창 융성할 때 만든 비석의 귀부는 고개를 정면으로 치켜들고 비상이라도 할 듯 포효하는 모습이나 국운이 쇠퇴할 때는 주눅이 들어서 그런지 고개를 틀고 있는 것이 비석의 일반적 형태이다. 따라서 이 이름 없는 거북좌대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아니고 신라 말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어림하여 짐작할 수 있다.
중앙공원(中央公園) 후문 쪽으로는 의병장 한봉수(韓鳳洙)[1883~1972] 송공비가 있다. 이 비석은 당초에 전면 비문내용을 놓고 왈가왈부했다. 비문의 내용을 ‘의병장’으로 할 것인가 ‘의병대장’으로 할 것인가 난상토론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 후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봇물처럼 터졌는데 그중 제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인석과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난 신돌석이 대표적이고 청주지역에서는 한봉수를 꼽게 된다. 청원 북일면 세교리가 고향인 한봉수는 왜병에게 치명적 타격을 여러 번 가했고 청주지방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의 의병은 조직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그 지도자도 ‘의병대장’이 아닌 ‘의병장’이 맞다고 본다. 송공비를 건립할 당시 이를 높여 ‘의병대장’으로 새겼다가 추후에 ‘의병장’으로 바꾸어 비석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개화의 물결이 소용돌이 칠 때 세운 척화비(斥和碑)도 빼 놓을 수 없는 중앙공원(中央公園)의 비석이다. 본래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1976년 2월 20일 정찬일(鄭燦日) 씨가 석교동 92-12 신충구씨의 집 앞 길가 하수도 뚜껑으로 있던 것을 발견하여 중앙공원(中央公園)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신은 절단된 상태로서 높이 95㎝, 폭 46㎝, 두께 19㎝이다. 흥선대원군이 집정할 당시에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를 응징하기 위해 만든 척화비중의 하나다. 비문내용은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등인데 중앙공원(中央公園)의 척화비에는 “양이(洋夷)”“즉화(則和)”등이 떨어져 나간 상태다. 풍상에 깎인 데다 무분별한 탁본 등으로 글자가 많이 훼손된 상태다.
근·현대사의 궤적도 중앙공원(中央公園)에는 많이 남아 있다. 중앙공원(中央公園) 중심부에는 1949년(단기 4282년)에 세운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있다. 거북좌대 위에 분수를 곁들인 이 비는 ‘칠만 시민 일동’이라는 구절이 있다.
4·19 직후인 1960년 중앙공원(中央公園) 향나무 아래에 ‘4·19 의거비’가 있었으나 이듬해 5·16이 발생하자 ‘4·19 의거비’는 종적을 감추었고 그 주변에 ‘5·16 기념비’가 들어섰다. 그 비석도 민정이 실시되자 중앙부에서 청주문화관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앙공원(中央公園) 서쪽으로도 비석이 많은데 대부분 작금에 세운 비이다. 청주향약비를 비롯하여 시계탑, 사회단체 기념비, 청주시민의 노래비,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청주시민헌장 등이 곳곳에 서 있다.
[충청병영의 부속건물들]
충청병영(忠淸兵營)이 있던 이곳에는 병영을 경영키 위한 건물이 많았다. 병마절도사의 처소인 청진당(淸塵堂), 도서실 격인 후당(後堂)과 반시당(反始堂), 병사의 집무소인 운주헌(運籌軒), 지휘소인 통군루(統軍樓) 등 수십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청녕각(淸寧閣) 현판을 잘못 달고 있던 병마절도사 영문(兵馬節度使 營門) 한 채만 남아 있다. 병마절도사 영문은 원문(轅門)이라고도 불렀다. 그 원문의 현판 이름은 정곡루(正鵠樓)로 추정된다.
병마절도사 영문은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본영을 드나들던 출입문의 문루(門樓)로 좌우로 담장이 이어져 병영을 에워싸고 있었다. 지난 1976년 12월 23일에 지방 유형 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은 목조 2층의 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익공(二翼工), 겹처마, 팔작집인데 4각의 고주석(高柱石)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누대(樓臺)는 정자(井字)를 깔았으며,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른 조서 후기의 전형적인 문루이다.
충청병영은 크게 봐서 3차례 정도 역사의 상처를 입었다. 그 첫째가 임진왜란이요, 둘째가 이인좌(李麟佐), 신천영(申天永)의 난이며 세 번째가 일제에 의해 청주읍성 자체가 허물어졌다는 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는 파죽지세로 북상하며 삼남의 요로인 청주성을 점거하였다. 흑전장정(黑田長政) 휘하의 부장인 봉수하가정(峰須賀家政)은 약 1만여 명의 군사를 이곳에 주둔시켰다. 이에 방어사 이옥(李沃)이 이끄는 관군과 조헌의 의병, 영규대사의 승병이 빙고재(지금의 모충동 고개)에 진을 치고 왜적과 일전을 치렀다. 의병은 서문을 주로 공격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자 남문, 북문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고 주력부대는 역시 서문을 공격하여 왜병을 물리쳤다. 이때 성문 밖으로 탈출한 한 여인이 “왜군은 야간 기습공격을 두려워하며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귀띔하였다. 이에 의병, 승병은 있는 힘을 다해 청주성을 탈환했는데 이때 관군보다 오히려 의병, 승병이 더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영조 4년(1728)에 있은 이인좌의 난은 당파싸움에 연루된 변란이었다. 소론파가 노론파를 몰아내기 위한 난이었다. 이인좌와 정희량(鄭希亮) 등은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옹립하려고 영남에서 모반하였다. 그래서 이인좌의 난은 ‘이인좌, 신천영’의 난으로 불리고 있으며 특히 청주지방에서는 그냥 ‘신천영의 난’으로도 불린다.
이인좌, 신천영은 청주성을 함락하는데 ‘트로이의 목마’ 와 같은 작전을 썼다. 상여에 무기를 숨기고 청주성에 입성하여 병영을 기습했다. 병영에서는 비장, 양덕부(梁德傅)가 난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슬그머니 열어 주었다. 이로 인해 병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 비장 홍림(洪霖)[1685~1728], 영장 남연년(南延年) 등 수많은 장수와 병졸이 전사하였다. 이 난이 진압된 후 조정에서는 삼충사(三忠祠)를 지어 세 장수의 충절을 기렸는데 조선 말기에 삼충사는 수동으로 옮겨져 표충사(表忠祠)라 부르고 있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1908년, 충청북도 관찰부(觀察府)는 충주에서 청주로 옮겼고 청주읍성은 퇴락하였으나 관찰부의 부성(府城) 역할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주성과 성내 관아 건물들은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는 시가지 개정이라는 미명아래 청주성을 허물고 그 성돌로 하수구를 쌓았다. 이로써 1,3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청주읍성은 종말을 고하고 청주 동헌인 청녕각과 더불어 병마절도사 영문, 망선루,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 등 몇 점의 문화재만 간신히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망선루]
중앙공원(中央公園) 북쪽 편에는 지난 2000년 12월에 청주제일교회에서 이건(移建) 복원한 망선루(望仙樓)가 위치하고 있다. 충청북도에서 발간한 문화재지(文化財誌)에 따르면 이 건축물은 객관 동쪽에 있어 취경루(聚景樓)라 하였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 공민왕 10년 (1361) 홍건적의 난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왕은 공주와 더불어 남으로 파천하여 안동으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청주에서 문과와 감시(監試)를 행하고 방(榜)을 취경루(聚景樓) 상에 게재했다고 한다.
조선조에 누각이 퇴락하여 세조 7년(1461)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중수하고 권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현재의 망선루(望仙樓)로 고쳤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4권 「청주목(淸州牧)」). 하늘의 선녀 또는 신비한 경치나 은하수 등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또한 목사(牧使) 이섬(李暹)이 중수하였고, 목사 이수득(李秀得)이 보수(保守)한 일이 있다. 그 후 청주보통학교 여자부 교사로 이용되다가, 일제 강점기인 1921년 유도장인 무덕전(武德殿) 신축으로 헐리게 되었다. 1923년 서문동 골목(현 조선면옥 뒤편)에 쌓아두었던 건축자재를 김태희(金泰熙) 등의 주선으로 남석교(南石橋) 언저리 청주제일교회 북동쪽으로 이건하여 청남학교 교사로, 또한 세광고등학교 교사로도 쓰였다. 그 이후 2000년까지 청주제일교회 건물에 인접·위치하여 교회의 교육관으로 사용되다가 2000년 12월에 중앙공원(中央公園) 북쪽 척화비가 있는 부근에 망선루를 이전·복원하였다.
망선루는 고건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충청도 지방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목조 건축물이 별반 없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팔작지붕에다 겹처마를 했고 기둥은 전통양식인 배흘림기둥이다. 배흘림기둥이란 기둥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위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형태를 말한다. 이로 인해 건물의 안정감과 균형미가 뛰어나다. 이층 마루는 우물마루 형태이다. 우물마루란 우물 정(井)자처럼 마루를 까는데 못을 쓰지 않고 가로, 세로로 짜 맞추는 형식을 말한다. 기둥 위에는 기둥머리가 있고 그 위로는 ‘도리’가 지나간다. 용마루와 같은 방향으로 놓인 것을 ‘도리’라고 하고 ‘도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을 ‘들보’라고 한다. 망선루의 ‘도리’는 맨 밖에 있는 ‘주심 도리’와 ‘중 도리’ 그리고 가운데를 지나가는 ‘종 도리’가 양쪽에서 대칭형을 이룬다.
건물이 크기 때문에 용마루를 받치는 대들보가 4개이고 대들보 위에는 이를 보좌하는 ‘종보’도 4개 있다. 종보는 대들보 보다 길이가 짧다. 전통적인 수키와 집으로 수키와 골 내림마루가 자연스럽게 하강을 하고 있으며, 추녀가 날렵하다. 주위로는 현간이 둘러쳐져 있다. 복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해체를 해보니 부식이 심해 안정성이 없어 결국 3분의 2정도를 새 목재로 충당하였다.
이외에도 2002년 9월에는 천주교 청주순교자 현양비가 공원 남쪽에 세워졌다. 1799년 순교한 원시보 야고보를 비롯한 4명의 청주지역 순교자를 기리는 돌로 앞머리에는 ‘순교자현양’이라 각자했다.
[의의 및 평가]
충청북도 청주시 남문로 2가 92번지에 있는 청주 중앙공원(中央公園)은 1,300여년 동안이나 청주의 노른자위 역할을 해온 청주 역사의 산 증인이다. 여기서 말한 ‘노른자위’란 중심지라는 의미와 더불어 역사의 축에 서 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듯 청주는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 3월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되었고, 신문왕 9년(689)에는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서원경성의 치소(治所, 행정의 중심지)가 어디냐에 대해선 학설이 구구하다. 상당산성설, 우암산 토성설, 청주읍성설 등이 얽혀 있는데 보편적으로 학계의 폭넓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청주읍성설이다.
서원경성의 치소가 청주읍성이 확실하다면 그곳은 고대 청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역사의 파수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서원경성의 치소가 아니었다 해도 나말여초(신라 말 고려 초)부터는 명실 공히 청주의 자방(子房)역할을 해왔다.
국보 41호인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은 나말여초의 사찰로 추정되는 ‘용두사’라는 절 입구에 있던 불기(佛旗)게양대이다. 당시에는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황룡사(黃龍寺), 분황사처럼 절이 도시의 중앙에 들어서는 예가 흔하였다. 그리고 절 이름 중에 용(龍)자가 들어가면 일반적으로 사찰의 규모가 크다. 지난 1970~1980년대 용두사지(龍頭寺址) 일대와 중앙공원(中央公園)으로 통하는 하수도 공사과정에서 거북좌대 등 나말여초의 불교유물이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아마도 용두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 유물로 여겨진다. 이는 청주읍성이 고려시대에도 청주지역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중앙공원(中央公園)은 삼국시대, 고려시대 읍성의 중심지였으며, 그 이후에도 조선시대 효종 2년(1651)에 충청병영이 충남 해미(海美)에서 청주로 옮겨왔을 때도 그 장소가 다름 아닌 현재의 중앙공원(中央公園)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