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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청주 출신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노모(老母)를 업고 산간(山間)으로 피난하다가 왜적(倭賊)을 만나 싸웠다. 양손으로 칼을 막아 손가락이 모두 끊어졌음에도 끝내 그 모친을 놓지 않으므로 왜적이 뒤로 돌아 그 모친을 살해하고자 하니 그는 어머니를 안고 칼을 맞아 죽었다. 1633년(인조 11)에 정려(旌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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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김학성(金學性)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형제들이 모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고 수일동안 연명하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했으며, 넷째 아들이면서도 정성을 다했다. 김병위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1875년(고종 12) 청주 영장(營將)이 표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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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청주 출신이다. 2세 때에 생모(生母)가 돌아가셨다. 14세에 종가(宗家)로 입양(入養)되었으나 항상 친부를 잊지 못하여 꿩과 토끼를 잡고 생선을 낚아 봉양하였다. 효행이 뛰어나 향리에서 여러 번 영문(營門)과 조정에 상신(上申)한 바 있으나 정려(旌閭)되지 못하고 1828년(순조 28) 그 효행이 인정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贈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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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은 김억손(金憶孫)이다. 청주 출신 열녀로 19세에 남편이 죽었고, 그 후에도 시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들에 나가 나물을 캐는 데 강폭한 자가 야욕을 품고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니 칼로 팔을 베어버렸고 죽을 때까지 수절하였다. 이 일이 조정에 상신되어 정려(旌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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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열녀. 손혁(孫赫) 처 박씨(朴氏)는 4년 시묘(侍墓)와 20년 이상 남편의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은 열녀로 조선 성종 때 정려되었다. 손혁의 처 박씨는 남편이 죽자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을 슬퍼하더니 다시 1년을 지낸 뒤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몸소 제사 지내기를 20여 년 동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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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청주 출신으로 아버지가 병이 들어 꿩고기, 물고기, 노루고기 등을 먹고 싶어 하자, 이것들을 모두 잡아다가 봉양하기를 극진하게 하였다. 향리 사람들은 하늘이 그 효도에 감탄하여 쉽게 구해진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여막에서 삼년을 지내면서 예를 다하였는데, 이 일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포상의 은전을 받았다. 1665년(효종 6)에 정려(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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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충신.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청주 출신으로, 고려 고종 때 몽고군 격퇴에 공을 세워 보성군에 봉해진 오현필(吳賢弼)의 후손이다.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장관(將官)으로서 용감하게 싸워 강도(江都) 남문(南門)에서 순절하였다. 후에 조정에서 포상의 은전을 내렸다. 고원군수를 지냈다. 1675년(숙종 1)에 정려(旌閭)되었다. 충청북도 청원군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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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효자. 청주 출신으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였다. 그 때 왜적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을 때, 적이 그의 어머니를 칼로 해치려는 순간 어머니를 안고 엎드려 함께 목숨을 잃었던 효자였다. 그는 자식 없이 죽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포상할 대상이 없어 향리인들이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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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청주 출신으로 어머니의 병이 깊어지자 똥을 직접 맛을 보아가면서 병의 차도를 진단하였을 정도의 효자였다. 어머니가 생선이나 과일 등 먹고 싶다는 음식은 모두 구해다가 봉양하였다. 친기(親忌 : 부모의 제사)가 닥칠 무렵 키우던 개가 새끼 낳을 때가 되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틀 동안 사라졌던 개가 새끼를 낳아 물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이웃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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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청주 출신으로 타고난 효성으로 이웃으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가세가 빈한하여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접하면 반드시 집으로 갖고 와서 어버이에게 드렸고, 먼저 먹는 법이 없었다. 어버이가 병이 들었을 때는 침식을 폐하고 병간호에만 매달렸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어버이를 업고 태백산으로 들어가 음식이 있으면 먼저 어버이에게 드리고,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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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청주 출신으로 조선시대 이름난 효자이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꿩고기가 먹고 싶다 하자, 지성으로 이를 구하여 봉양하였다. 효행으로 이름 높아 조정에서 중추부사(中樞府事)란 관직을 내리고, 삼대(三代)를 추은(推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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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고려 고종(高宗) 때 몽고군 격퇴에 공을 세워 보성군에 봉해진 오현필(吳賢弼)의 후손이다. 효자로 칭송되었던 오진택(吳振澤)의 아들이고, 역시 효자로 이름 높던 오상건(吳尙健)의 손자이다. 청주 출신으로 효행으로 이름 높던 청원군의 보성오씨(寶城吳氏)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효행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가 죽은 후 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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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남편은 이실만(李實萬)이다. 관청의 노비였는데 19세에 이실만의 처가 되어 시아버지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시어머니 제사도 지성으로 지냈다. 그 행실을 귀히 여겨 잡역에서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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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원로(元老), 호는 몽암(蒙菴)이다. 아버지는 예조참의 유인귀(柳仁貴)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현감 이장생(李長生)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년) 진사(進士)가 되고, 1516년(중종 1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官檢閱)이 되고, 이듬해 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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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백춘(伯春)이며,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다. 아버지는 이형(李泂)이며, 어머니는 최대년(崔大年)의 딸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정언 등을 역임하고, 1689년에 지평(持平)이 되어 송시열(宋時烈), 윤증(尹拯)의 시비를 분별할 것을 상소하자 왕이 가납하였으며, 홍문록(弘文錄)에도 올랐다. 이어서 정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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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세종 때 생원시에 합격한 후 1432년(세종 14) 식년시(式年試)에 동진사(同進士) 1등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 교리로 재직 하던 1445년에는 세자의 명을 받아 양전(量田)을 시험하는 공을 세웠고, 1450년(문종 1) 경기도 광주판관(判官)으로 있을 때에 국법을 어긴 승려 설정(雪正)과 도명(道明)을 체포하는 일 때문에 군사를 내어 몹시 놀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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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덕수(德廋)·항승(恒承)·대수(大廋)이고, 호는 성헌(醒軒)이다.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후손으로, 이만선(李萬善)의 아들이며 이만원(李萬元)의 조카이다. 정랑 이만성(李萬成)에게 입양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여당이라는 무고를 당하여 친국을 받았으나 논리정연하게 논변하여 영조(英祖)로부터 재주를 인정받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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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유의(儒醫). 본관은 온양(溫陽)이며,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이다.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정순붕(鄭順朋)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 3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또한 음률에 밝고 현금에도 정통하여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로서 가곡의 장단을 지도하는 한편, 천문과 의술에도 이치가 밝아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 후에 포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