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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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九萬里-竹- |
이칭/별칭 | 구만동과 죽암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녹명리 |
집필자 | 박유미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71년 - 「구만리와 죽바위」 유증선이 발간한 『영남의 전설』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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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1년 - 「구만리와 죽바위」 『내 고장 전통문화』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1년 - 「구만리와 죽바위」 『청도군지』에 수록 |
관련 지명 | 구만 -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녹명리 |
채록지 | 녹명리 -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녹명리 |
성격 | 설화|지명 전설|암석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마을 사람들|왜군|나무꾼|이승 |
모티프 유형 | 유래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녹명리에 전해 오는 구만 마을에 대한 이야기.
[개설]
「구만리와 죽바위」는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녹명리의 자연 마을인 구만(九萬) 마을과 죽바위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71년 유증선이 발간한 『영남의 전설』에 「구만리와 죽암」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청도군에서 1981년에 발간한 『내 고장 전통문화』와 1991년에 발간한 『청도 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청도군 각남면 녹명리(鹿鳴里)의 옛 이름은 구만동(救萬洞)이다. 이 동네가 구만동이라 불린 것은 조선 시대부터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이 길을 나누어 창녕, 영산, 밀양을 거쳐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다. 당시 구만동 앞에 있는 운정산(雲亭山)은 사방이 한눈에 보이는 요지였다. 왜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마을 주민들은 이웃 마을 주민들과 함께 운정산에 숨어서 성을 쌓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다행히 왜군들은 운정산에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그대로 지나쳐서 북상하였다. 이렇게 운정산에 숨어 있던 1만여 명이 목숨을 건졌다고 해서 마을의 이름이 구만동이 되었다.
운정산의 성터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높이 20m 정도의 널따랗게 펼쳐진 죽바위가 있다. 죽(粥)을 그처럼 넓은 그릇에 담아야 편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1700년경에는 한 이승(異僧)이 바위 곁을 지나다가 나무꾼에게 바위의 이름을 물었다. 나무꾼이 죽바위라 하자 이승은 이곳이 장차 장사가 태어날 고장이라 하고, 장사가 죽을 먹고는 힘을 쓸 수 없다며 대나무를 한 그루 구해 와 심었다. 이승은 바위의 이름을 앞으로 죽암(竹岩)이라 부르라고 이르고는 사라졌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그 바위를 죽암이라고 불렀다.
[모티프 분석]
「구만리와 죽바위」의 주요 모티프는 ‘유래(由來)’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로 인해 구만리라는 지명과 죽바위라는 암석 명칭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구만리라는 지명에서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증거로 두어 역사성과 함께 사실성을 보장받고, 죽바위라는 암석 명칭에서는 실재하는 죽바위를 증거로 두어 사실성을 보장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