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128 |
---|---|
한자 | 全八龍 |
이칭/별칭 | 호석(昊石),소우(小牛)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 384번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 전팔룡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11월 19일 - 전팔룡 군용 열차 전복 의거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12월 18일 - 전팔룡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전팔룡 징역 5년 3개월로 감형 |
몰년 시기/일시 | 1963년 - 전팔룡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전팔룡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전팔룡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 384번지 |
활동지 | 전팔룡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 969-2 청도역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군용 열차 전복 의거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전팔룡은 1911년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고수리(高樹里)에서 출생하여 1963년 사망하였다. 전팔룡은 1931년 11월 19일 군용 열차 전복 의거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전팔룡(全八龍)[1911∼1963]은 본적이 청도군 각남면(角南面) 화동(華洞) 358번지이며, 주소는 청도군 대성면 고수동 384번지로, 김기근(金基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10월부터 1919년 11월까지 이영희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1930년 1월부터는 이영희 곡물상에서 일을 하였다.
1931년 만주 사변이 발발한 이후 전팔룡은 박근이(朴根伊)·추진구(秋振求) 등과 함께 철도 폭파 계획을 추진하였다. 1931년 11월 18일 밤 만주 지역으로 파견되는 일본군과 무기를 실은 수송 열차가 청도역에 도착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김광조(金光祚)의 집 부근에서 길이 약 30.3㎝, 폭 21.21㎝, 높이 약 15.15㎝, 중량 약 15㎏의 돌 하나를 주워 선로 내의 침목 위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건널목 서편의 배인상(裵寅相)의 집 앞에서 열차가 지나가다가 전복하기를 기다렸다.
11월 19일 오전 0시 22분 청도역에 도착한 일본군 제8 사단 야포병 제8 연대 1개 대대와 병포·중기관총·필마 등 군용 물자를 실은 봉천행(奉天行) 임시 제3 군용 열차는 0시 24분 청도역을 출발, 27분 건널목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이 돌은 열차의 아래에 장치된 제동 장치에 걸려 약 50m 정도 끌려갔을 뿐, 열차를 전복시키거나 파괴시키지는 못했다. 이 사건은 선로를 경비하던 철도 보선 공부(補繕工夫)가 발견하고 역장에게 보고하여, 일제 경찰의 조사로 전모가 밝혀졌다.
전팔룡은 이 일로 1931년 12월 18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4년 칙령 제19호에 의하여 징역 5년 3개월로 감형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