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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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夏彦 |
이칭/별칭 | 미중,지당,옥호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후기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미중(美仲), 호는 지당(止堂)·옥호자(玉壺子). 정석기(鄭碩基)의 손자로 목사 정무(鄭堥)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윤우태(尹遇泰)의 딸이다.
[활동 상황]
정하언(鄭夏彦)[1702∼1769]은 1735년(영조 11) 진사로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42년(영조 18) 경상도 도사 시절 진휼사의 종사관으로 선발되어 경상도의 양곡을 중앙으로 운반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감진어사(監賑御史) 홍계희(洪啓禧)와 의견이 달라 삭직되었다.
1744년(영조 20) 조정에서 『속대전』을 찬수할 때 왕의 특명으로 찬집랑(纂輯郞)에 보임되어 법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1745년(영조 21) 사간원 정언, 1746년(영조 22) 사헌부 장령을 역임한 후, 1746년(영조 22) 8월 청도 군수로 도임하였다가 1747년 7월에 의주부윤으로 자리를 옮겼다. 1749년 좌부승지에 이어, 1763년 병조 참의에 오르고 대사간을 지냈다.
삼척부사 시절 귀양 온 채제공(蔡濟恭)과 어울리다 서울 명덕동에 땅을 구입하여 정자를 짓고 수옥대(漱玉臺)라 이름하였다.
[학문과 저술]
독서를 좋아하였고 문예와 글씨에도 능하였는데, 조구명(趙龜命)이 정하언의 글을 읽고 “『소동파집(蘇東坡集)』에 실려도 손색이 없겠다.”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경연에서도 재량 있는 말로 왕의 칭찬을 많이 받았으며, 어제(御製)의 편제(篇題)와 홍화문(弘化門), 쌍수성 공북루 중수기(拱北樓 重修記)의 액(額)을 썼다. 저서로는 『지당집(止堂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