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7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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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黑石里- |
이칭/별칭 | 안국암 각석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흑석리 1636-88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인표 |
현 소재지 | 흑석리 새김글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흑석리163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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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새김글 |
양식 | 음각 |
관련 인물 | 이언적(李彦迪)|박수춘(朴壽春) |
소유자 | 청도군 |
관리자 | 청도군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흑석리에 있는 바위 새김글.
[개설]
풍각면 흑석리 동쪽 풍각천변 안국암에 새겨진 새김글이다. 다듬지 않은 바위 면에 글자를 음각하였다. 새김글은 이언적(李彦迪)[1491∼1548]이 지나가면서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지은 시 한 수와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수춘(朴壽春)[1572∼1652]이 회재 이언적을 추모하면서 지은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이언적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복고(復古), 초명은 적(迪), 호는 회재(晦齋)이다. 1514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30년 사간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핍박을 받아 고향 경주로 낙향하여 학문에 열중하였다. 이조·예조, 병조 판서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 한성 판윤 등을 지냈으나 을사사화 때 심문관으로 임명되자 사직하였다. 1547년 양재역 벽서(良才驛 壁書) 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성리설의 이(理)를 깊이 연구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박수춘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경노(景老), 호는 국담(菊潭)이다. 정유재란[1597] 때 의병을 일으켜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곽재우를 도와 왜적과 싸웠다. 병자호란[1636] 때도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입산하여 정구, 장현광 등과 함께 이기론을 토론하는 등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로는 『국담집(菊潭集)』, 『학문유해(學問類解)』 등이 있다. 후에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추증되었으며, 남강 서원(南岡書院)에 제향되었다.
[건립 경위]
이언적이 지나가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하는 시를 남기자 청도 사람들이 이를 바위에 새겼으며, 그 후 박수춘이 이언적을 그리워하여 시를 남기자 역시 바위에 새기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풍각면사무소에서 창녕 방향으로 국도 20호선 따라가면 흑석리에 이른다. 흑석 2리 마을 회관을 지나 안산교 못 미쳐 있는 안국 마을 동쪽 풍각천 옆 안국암에 있다.
[형태]
일정한 양식 없이 다듬지 않은 자연 상태의 바위 면에 시 2수를 음각하였다.
[현황]
비록 다듬지 않은 바위 면에 글자를 새겨 상당히 거친 느낌이지만, 잘 보존되어 모든 글자를 읽을 수 있다. 새김글을 보호하는 보호 시설이나 설명 표지판은 없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의 대학자인 이언적이 남긴 시와 이언적을 존경하는 박수춘의 마음을 담은 시를 볼 수 있고, 이에 대한 청도군 주민들의 인식을 알 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