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734 |
---|---|
한자 | 金容復頌德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602-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채광수 |
건립 시기/일시 | 1915년 - 김용복 송덕비 건립 |
---|---|
현 소재지 | 김용복 송덕비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602-2 |
성격 | 송덕비 |
양식 | 비좌개석(碑座蓋石) |
관련 인물 | 김용복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너비,두께) | 110㎝[높이]|39㎝[두께]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김용복의 송덕비.
[개설]
한말 문신 겸 학자인 김용복[1857∼1933]은 본관은 김해, 호는 탁운(濯雲)이다.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으로 감역(監役) 김병두(金柄斗)의 아들이다. 벼슬은 음직(蔭職)으로 1898년(광무 2) 숭선전 참봉과 1902년(광무 6)부터 1906년(광무 10)까지 하양 군수를 역임한 뒤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풍의가 빼어나고 성정과 도량이 호협하여 학문이 높고 시문에 능하였다. 저서로 6권 1책의 『탁운 유고(濯雲遺稿)』가 전한다.
[건립 경위]
화양읍 토평리 일대 주민들이 김용복이 베풀었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세운 송덕비이다.
[위치]
화양읍 토평 2리 마을 회관 앞 길가에 세워져 있다. 50m 떨어진 길가에는 아우인 김용희(金容喜) 선정비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형태]
비좌는 매몰된 것으로 추정되며, 비신 위에 팔작지붕의 개석을 얹은 비좌개석(碑座蓋石) 양식이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 110㎝, 넓이 39㎝이다.
[금석문]
정삼품 전 군수 김용복 송덕비(正三品前郡守金容復頌德碑)// 수성이덕(守成以德)/ 휼궁시인(恤窮施人)/ 내명편석(迺銘片石)/ 영전천춘(永傳千春)// 을묘십일월일(乙卯十一月日)// 이종준(李鍾俊) 이시우(李時雨) 최덕수(崔德守) 최봉룡(崔奉龍) 감(監)[덕으로써 지키고 이루시어/ 궁핍한 사람을 구휼하고 인을 베푸셨네./ 이에 작은 비석에 새기노니/ 길이 천년토록 전하리라. 1905년 11월.]
[현황]
김용복 가문은 근대 청도 지역을 대표하는 대지주이다. 아우 김용희 송덕비를 포함하여 총 4기의 송덕비가 현존하는 것으로 보아 화양읍 토평리에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용복 송덕비는 별도의 비각(碑閣)과 안내판 없이 세워져 있으며, 비석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