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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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陳羅里無文土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기명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김구군 |
출토|발굴 시기/일시 | 2002년 7월 29일∼2003년 5월 30일 - 진라리 민무늬 토기 발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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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장처 | 진라리 민무늬 토기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76 |
출토|발견지 | 진라리 민무늬 토기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진라리 918-1 |
성격 | 토기 |
양식(문양) | 민무늬 |
재질 | 점토 |
크기(높이) | 15㎝∼40㎝ |
소유자 | 국립 경주 박물관 |
관리자 | 국립 경주 박물관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진라리에서 출토된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
[개설]
2002년 대구∼부산 고속 도로 건설 과정에서 발굴된 진라리 유적 중 움집터[竪穴住居址], 고상식 건물지(高床式 建物址), 구덩이 유구[竪穴遺構], 도랑 유구[溝狀 遺構]와 고인돌 등에서 360여 점의 민무늬 토기[無文 土器]가 출토되었다.
이 토기의 기종은 바리 모양 토기[鉢形土器], 항아리 모양 토기[壺形 土器], 독 모양 토기[甕形 土器]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음식 그릇[食器]과 저장 용기(貯藏 用器), 음식을 삶거나 끓이는 데 사용한 자비 용기(煮沸 用器)들이다. 영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발굴하였고, 현재 유물은 국립 경주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형태]
바리 모양 토기는 아가리와 굽 지름의 비율이 높이 20㎝ 내외인 것을 기준으로 2:1 정도인데, 아가리와 높이의 비율이 1:1 미만인 얕은 바리[淺鉢]는 높이가 15㎝ 이하이면서 굽이 넓은 대신에, 깊은 바리[深鉢] 가운데 높이 25㎝ 이상인 큰 토기들은 굽이 오히려 좁다.
깊은 바리는 15㎝ 이하의 작은 것에서부터 40㎝를 넘는 큰 것까지 부류가 다양하다. 기벽의 오름은 깊은 바리의 경우 대체로 굽에서 20°∼30° 정도의 기울기로 벌어져 오르다가 동체 중하위를 거치면서 약한 호선을 그리다 점차 수직에 가깝게 이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거의 직선화한 것도 있다. 아가리는 동체의 최대 지름보다 좁혀 들어가 대부분이 안쪽으로 기울지만 수직에 가까운 것도 있다. 얕은 바리는 깊은 바리의 상부가 생략된 여러 형태를 생각하면 무난하다.
항아리 모양 토기는 모두가 대형의 토기로, 길고 둥근 동체의 최대 지름이 중상위에 있으면서 굽보다 목이 1.5배가량 넓어 다소 불안정한 동체에 5∼8㎝ 높이의 목이 달렸다. 목에서 아가리로 이행하는 기벽이 수직으로 오른 것과 바깥으로 해바라진 두 종류가 보인다.
붉은 간 토기는 세장방형과 장방형 주거지의 것들은 최대 지름이 동체의 하위에 위치하여 아래로 다소 처진 양파 모양의 몸통을 가졌고 바닥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그리고 목 지름이 몸통 최대 지름의 절반 수준으로 좁혀 들며, 목 부분[頸部]은 살짝 외반하는 듯 거의 수직으로 오르다가 아가리 직하에서 바깥으로 바라진다. 장방형 주거지에서는 몸통 최대 지름의 위치에 상하로 구멍이 뚫려 있는 가로 귀[橫耳]가 달린 붉은 간 토기가 동반한다. 그러나 말각 방형 주거지[抹角 方形 住居址]나 고인돌[支石墓]에서 나온 것들은 몸통의 최대 지름이 중위로 이동하고 경부는 이전과 달리 오히려 안으로 좁혀 들었다가 아가리 쪽에서 반전하는 형태로 바뀌며, 바닥은 각을 죽인 평저[抹角平底]로 변해간다.
[특징]
세장방형 주거지와 장방형 주거지에서는 복합문과 단독문, 무문양이 공존한다. 반면 송국리 단계인 말각방형과 원형 주거지에서는 매몰토 출토품을 제외하면 문양이 베풀어진 토기는 보이지 않는다.
문양을 베푼 토기에는 골아가리 무늬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짧은 빗금무늬, 구멍무늬 순이다. 그리고 구멍무늬 토기가 구멍무늬로만 이루어진 단독문과 짧은 빗금무늬의 변형인 ×선 무늬와 결합한 복합문을 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겹아가리 짧은 무늬 토기는 골아가리 무늬와 결합된 것이 대부분이다. 수혈 유구 3호에서 나온 아가리 조각 하나를 제외하면 단독문으로 된 것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겹아가리의 형태도 전형적인 것은 보이지 않고 겨우 흔적만 남았거나 점토 띠의 접합 부분을 정면하지 않고 그대로 둔 아주 퇴화된 형식뿐이다. 또한 겹아가리의 흔적 기관에 선을 그어 대신 나타내던 것조차 생략하고 짧은 빗금무늬만을 베푼 것이 함께 나오고 있어 해당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진라리 유적의 민무늬 토기는 청도 지역에서 최초로 조사된 청동기 시대의 대규모 취락 유적에서 출토한 일상생활 토기와 무덤의 부장 토기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토기들은 세장방형 주거지를 필두로 하는 청동기 시대의 전기 후반부터 송국리형 원형 주거지가 축조된 중기 후반까지 연속하여 나타나고 있으며, 고인돌에서도 출토하고 있다. 따라서 지역 문화의 변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 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한국 청동기 시대 문화라는 큰 범주 속에서 청도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고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