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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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縣里里 |
이칭/별칭 | 유산(幽山)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윤제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고려 시대 이후 풍각현의 중심지로서 현청이 있었던 마을이다.
[명칭 유래]
현리리는 원래 풍각현청이 있었던 곳이었다. 때문에 현리(縣里)라 했다가 리가 동으로 바뀌면서 현리동(縣里洞)이 되었다가 다시 동이 리로 바뀌면서 현리리가 되었다. 『밀주지(密州誌)』에는 부(府)에서 서북쪽 60리에 있으며 본래 상화촌현(上火村縣)이었다고 한다. 유산(幽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형성 및 변천]
상화촌현에서 풍산현으로, 유산현으로 불리다가 풍각현으로 불리던 시절에 현청(縣廳)이 있던 마을이다. 고려 때에는 밀양 도호부, 조선 시대에는 대구부에 있다가 1895년(고종 32)에 청도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각북면의 율정동 일부를 병합하여 현리동이 되어 풍각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현리동에서 현리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청이 있던 장소는 지금의 호동(虎洞)이다. 현이 있었을 때에는 창고가 있었는데 동·서·남에 3동이 있었으며 보관된 곡식은 겉곡, 맥미, 콩, 메밀, 보리 등을 아울러 3만 4600여 석이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다 없어졌다. 1608년(선조 41)에 부사 기효복(奇孝福)이 동쪽에 1동을 중창하였고, 1614년(광해군 6)에 부사 성진선(成晉善)이 또 서쪽에 1동을 중창했으며, 1634년(인조 12)에 부사 이유달(李惟達)이 다시 고쳐 지었다. 1624년(인조 4) 부사 이안직(李安直)이 좌기청(坐起廳)을 중창하였고, 모아둔 곡식은 쌀, 콩, 메밀, 보리 등이 있었다. 객사는 창고 북쪽에 있었고, 동상방으로는 중대청이 있었다. 서상방은 곧 청방과 공주가 있는데 잡다한 방이 50여 간이 되었다. 또한 양과 돼지를 키우는 곳을 두었다.
풍각현은 청도로부터 현풍, 창녕을 왕래하는 큰길에 있었으므로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인 사성(使星)으로 오는 손님은 본부를 통과할 때 반드시 이곳 역참에서 출발하였다. 향교가 있었고, 승란정(勝蘭亭)이 있어 향인들의 활 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자연 환경]
비슬산에서 발원한 현리천이 성곡리을 거쳐 현리리 앞을 지나 봉기리 끝 부분 싱매산 모퉁이에서 풍각천과 합류한다. 풍산에서 내려온 산등이 야리 고개에서 멈춘다. 야리 고개 앞에는 낚시산이 있고, 제일 높은 봉을 노인봉이라 한다. 풍각 초등학교 뒷산은 붕어산인데 노인이 붕어를 낚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봇도랑에서 내려오는 물이 끊임없이 마을로 흘러들어 주민들이 여러 가지 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앞 봉기리 빔비못을 안고 있는 듯한 현리리는 마을 앞에는 경작지가 별로 없다. 등 너머 각북면 쪽 천변(川邊)에 있는 밭에서는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가 사과밭을 경영하면서 선진적인 영농 재배를 시행하여 청도 사과의 품종을 한 단계 앞선 제품으로 만들었다.
[현황]
2012년 7월을 기준으로 면적은 2.45㎢이며, 총 92가구에 194명[남자 94명, 여자 1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각북면 명대리·풍각면 송서리, 서쪽은 풍각면 성곡리, 남쪽은 풍각면 봉기리, 북쪽은 각북면 삼평리·우산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현리리 동남쪽을 지방도 902호선이 삼평리 방면으로 지나간다.
현리리의 마을 중 비석걸에는 수많은 선정비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되고 행정 구역이 변하면서 선정비와 영세불망비가 묻혀 버렸고, 최근에 마을 안길 포장을 하면서 발굴된 선정비 4기만 남아 있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던 현리는 일찍이 마을 공동체로 마을 회관을 만들어 2층은 회관으로 사용하고 아래층은 공장으로 임대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