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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61
한자 趙炳玉
이칭/별칭 유석(維石)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 5월 21일연표보기 - 조병옥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60년 2월 15일연표보기 - 조병옥 사망
성격 독립운동가|정치인
성별
대표 경력 흥사단|신간회|내무부 장관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치인.

[가계]

본관은 한양. 호 유석(維石).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 조인원(趙仁元)[또는 조택원(趙澤元)], 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 조병옥(趙炳玉)[1894~1960]은 1894년 5월 21일 충청남도 천안군[지금의 천안시] 동면 용두리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1. 신학문 수용과 미국 유학

조병옥의 집안은 예전부터 유학의 전통이 강하여 유년 시절 『동몽선습』과 사서삼경 등 한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부친 조인원이 1908년 3월 천안·공주 일대를 순회하며 전도하던 미국 감리회 선교사 케이블(E. M. Cable)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사상의 전환을 이루었다. 이에 조병옥도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한편 케이블 선교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 학교에 입학하여 신식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당시 영명 학교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육을 실시하여 근대 의식을 배양하는 학교였다. 조병옥은 일찍부터 한문을 공부해 한학 실력이 뛰어났고, 기본적인 교육이 잘 되어 있어서 5년제의 소학 과정과 2년제의 특별 중학 과정을 2년 만에 마쳤다.

조병옥은 공주 영명 학교를 졸업한 후 1911년 평양 숭실 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2년 동안 수학하였다. 평양 숭실 학교를 졸업한 조병옥은 수난에 처한 민족에 도움을 주기 위해 더 큰 실력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914년 1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조병옥은 로웰 중학교에 입학하여 부족한 영어 공부를 하면서 본격적인 미국 유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1918년 펜실베이니아 주 킹스톤 시의 와이오밍 고등학교를 졸업한 조병옥은 그해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22년에 졸업하였다. 1년 후 그는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1925년 2월에는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 독립운동

미국 유학 중 조병옥은 미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흥사단(興士團)의 조직 결성에 참여하고 가입하여 충청도 대표로 활동하였다. 조병옥은 1919년 국내 3·1 운동의 영향으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재필·이승만·정한경이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 회의’를 개최할 때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과 새로운 국가 건설의 열망을 전 세계로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1919년 말 기독교 청년회 만국 학생 대회가 개최될 때 조병옥은 한국 유학생을 대표하여 참가하였다. 1920년 4월 20일 뉴욕 한국 친우회 결성을 서재필과 함께 뒷받침하였다. 서재필이 뉴욕에서 3·1 운동 1주년과 2주년 행사를 거행할 때 조병옥은 행사 주관자가 되어 대대적인 집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고, 1921년 뉴욕 한인 교회가 설립될 때 창립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설립된 뉴욕 한인 교회는 뉴욕 한인 사회의 거점이자 한국 독립 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1921년 4월 30일 북미 대한인 유학생 총회가 결성되자 회장 이용직과 함께 부회장에 선임되어 한인 유학생회를 이끌었다.

귀국 직후 조병옥이광수와 함께 흥사단의 국내 조직인 ‘수양 동맹회(修養同盟會)’에 가입하여 흥사단 운동에 뛰어들었다. 1925년 10월 수양 동맹회가 동우 구락부와 통합하여 수양 동우회가 결성될 때 조병옥은 수양 동우회를 비정치적인 수양 단체의 범주에서 벗어나 합법적인 정치 단체로 전환시키려 하였다. 즉 수양 동우회를 민족주의 단체로 변환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안창호이광수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조병옥은 1927년 2월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의 산물인 신간회가 창립될 때 본부의 간사로 선출되었다. 또한 신간회 복대표 대회에서 집행 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가 곧 본부 교육부장에 선임되었고, 1929년 7월 21일 개최한 경성 지회 임시 대회에서는 경성 지회 집행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조병옥은 일제의 집회 금지와 언론 압박의 탄압에 맞서 강연 및 연설과 같은 계몽운동은 물론 정치·사회·경제 문제에 관한 실천적인 투쟁으로 신간회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1929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본부는 대대적인 민중 운동으로 발전시킬 의도로 동년 12월 10일 민중 대회를 계획하였다. 이때 기독교계 세력을 대표하던 조병옥은 불교계와 천도교 청년당 세력 간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대회 개최 바로 직전 일제는 신간회허헌조병옥 등 44명과 근우회·청년 총연합회·노동 총동맹 관련자 47명을 체포하여 민중 대회를 무산시켰다. 이 일로 조병옥은 3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가, 1932년 1월 22일 가석방으로 출옥하였다.

조병옥은 출옥 직후 민족의 얼을 살리고 확산시키기 위해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11월 조병옥은 조선 일보사 사장 조만식과 편집국장 주요한과 함께 영업국장이 되어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여 1933년 6월 조만식이 조선 일보사 고문이 되었고, 사장 자리를 방응모에게 넘기고 신문사 운영에서 손을 뗐다. 신문사에서 나온 조병옥은 일제의 철저한 감시로 학교의 일이나 다른 사회 사업 등이 어렵게 되었다. 연이은 체포와 투옥 생활로 지쳐 있던 조병옥은 일제가 압박과 회유로 친일 협력과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고향인 천안군 용두리로 낙향하여 광복 때까지 지냈다.

3. 해방 후 활동

광복이 되자 조병옥은 미군정청의 경무 부장이 되어 철저한 반공주의 입장에서 좌익 척결에 앞장섰다. 그러나 조병옥은 전직 친일 경찰들을 대거 채용함으로써 1946년 10월 ‘대구 사건’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후 그는 1949년 2월 신익희와 함께 민주 국민당을 창당하였고, 1950년 7월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51년 5월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그는 1951년 6월부터 그 이듬해 9월까지 제16대 대한 체육회 회장, 제5대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6·25 전쟁의 휴전이 얼마 남지 않은 1953년에 다시 내무부 장관이 된 그는 대구 방위 전선을 진두 지휘하여 대구 지역을 사수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과의 의견 충돌로 또다시 장관직에서 사임하였다.

1955년 조병옥신익희·장면·정일형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하여 민주당 구파 편에 서서 야당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58년 조병옥은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서울 성동 을에서 민의원에 선출되었다.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 대회에서 조병옥장면을 제치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제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1960년 갑자기 발생한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후 선거를 불과 23일 앞두고 미국 월트 리드 육군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은 부정 선거를 저질러 결국 4·19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으로 조병옥의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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