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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42
한자 李東寧
이칭/별칭 봉소(鳳所),석오(石吾),석오(石五),석오(石梧),암산(巖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9년연표보기 - 이동녕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40년 3월 13일연표보기 - 이동녕 사망
출생지 이동녕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신민회|경학사|권업회|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 石五, 石梧)·암산(巖山)이다. 1869년 10월 6일 충청남도 천안에서 영해 군수를 지낸 아버지 이병옥(李炳鋈)과 어머니 광주 안씨 사이에서 큰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 구한말 애국계몽운동

이동녕(李東寧)[1869~1940]은 고향에서 서당을 다녔고, 10세 때부터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1885년 서울로 올라왔으며 이후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영해, 평안남도 평양, 함경남도 원산 등으로 옮겨 다녔다. 1892년에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896년에 서재필(徐載弼) 등이 조직한 독립 협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 협회가 주최하는 만민 공동회가 열렸을 때 정부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로 인하여 이준(李儁)·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898년 출옥 후 『제국 신문』을 중심으로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에는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등 기독교인들과 YMCA 운동을 전개하였고, 상동 교회에서 전덕기·양기탁(梁起鐸)·조성환(曺成煥)·신채호(申采浩)·이회영(李會榮) 등과 상동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06년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한인 동포들의 교육을 위해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열었다. 다음해 이상설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 평화 회의에 고종의 특명을 받고 특사로 파견되자, 국내로 돌아왔다.

1907년 4월 안창호(安昌浩)·이회영·양기탁·전덕기·이동휘(李東輝)·유동열(柳東說)·이갑(李甲)·김구(金九) 등과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2. 서간도, 연해주 활동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동녕은 신민회 회원들과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여기서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의견이 모아지자 이동녕이회영 등과 독립운동 기지를 물색하는 책임을 맡아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답사하였다. 이 결과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독립운동 기지로 선정하게 되었다.

1910년 12월부터 신민회 회원들의 서간도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회영 6형제를 비롯하여, 안동 지역의 혁신 유림인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김대락(金大洛) 등이 압록강을 건너 독립운동 기지로 물색한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였다. 1911년 4월 삼원보에서 군중 대회를 열고 자치 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 그리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무관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동녕은 1913년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다. 이동녕이 연해주로 간 것은 이상설과 관련이 있었다. 이상설이종호(李鍾浩)·정재관(鄭在寬)·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면서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동녕은 1914년 이상설·이동휘·정재관 등과 함께 경술국치 이후 최초의 정부 이름을 남긴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웠으며, 군대를 편성하여 항일 전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각 지역에 군대를 편성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동북 만주의 수분대전자(綏芬大甸子)에 있는 나자구(羅子溝)에 사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는 사업도 추진하였다.

이동녕은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조선인 정치 망명자 대회에 남만주 한족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는 이동휘 주도하에 개최된 대회로 연해주와 만주 지역의 주요한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신민회·권업회·대한 광복군 정부 등에서 활동한 인사들이 모여 독립운동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였다. 1919년 만주 길림에서 이동녕김교헌(金敎獻)·유동열(柳東說)·조소앙(趙素昻)·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국내외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내용의 대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3. 상해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부정하는 독립 선언이 발표되고 이를 계기로 ‘독립국’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이동녕조성환·이시영 등과 상해로 향했다. 상해에는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국’을 세우려는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 29명의 대표들이 참가하여 4월 10일에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가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이었고, 이동녕은 임시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동녕은 의장으로서 첫 회의를 주재하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고, 정부의 관제와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원의 선출, 그리고 헌법으로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이란 내용의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제정하여 통과시켰다. 이로써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언한 후 40여일 만에 중국 상해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임시정부,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무렵, 이동녕은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에서 내무부 총장에 선임되었다. 한성 정부는 국내에서 홍진(洪震)·이규갑 등 서울과 경기·충청 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것으로, 1919년 4월 23일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1919년 9월 11일 연해주·상해·한성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루어, 새롭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였다. 대통령에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선임되었고, 이동녕은 내무 총장에 선임되었다. 11월 3일에 국무총리 및 각부 총장과 취임식을 거행하였고, 통합된 임시 정부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상해에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의 각원들 사이에 여러 가지 마찰이 일어났다. 통합 정부 출범 직후부터 대두되었던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문제가 더욱 격화되어 탄핵문제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던 많은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떠났고, 이로 인해 정부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1924년에는 노백린 국무총리마저 사퇴하였다. 이동녕노백린에 이어 국무총리에 선임되었고, 내각을 조직하여 정부를 유지해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1925년 3월 임시 의정원에서 탄핵을 당했고, 박은식(朴殷植)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한 후 1925년 4월 7일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국무령으로 선출된 인사들이 취임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또 홍진은 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국무령을 사임하기도 하였다. 홍진이 사임한 후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하여 내각을 구성하면서, 임시정부는 그 조직을 유지하게 되었다. 1926년 12월 이동녕은 임시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1927년 4월 국무령제를 집단 지도 체제인 국무 위원회제로 전환하는 헌법을 개정하였다. 그해 8월 이 헌법에 의해 새 내각을 구성할 때, 이동녕은 국무 위원회 주석과 법무장에 선임되었다.

4.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 결성

1927년 전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민족의 유일한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일당 운동은 1926년 말 상해에서 비롯되었다. 1927년 4월 좌우익 세력들이 참가한 가운데 상해의 삼일당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였고, 홍진·윤기섭(尹琦燮)·송병조(宋秉祚)·홍남표(洪南杓) 등과 유일당 결성을 촉구하기 위해 한국 유일 독립당 상해 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9월에는 북경·남경·무한·광동에서 조직된 촉성회와 연합하여 한국 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를 결성하고, 유일당 결성을 추진해 나갔다.

민족 유일당 운동은 1929년 10월 상해 촉성회가 해체되면서 사실상 결렬되었고, 이후 좌익 세력은 별도로 유호 한국 독립운동자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이동녕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안창호·김구·조소앙·조완구·송병조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과 함께 1930년 1월 상해에서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였다. 한국 독립당은 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하기 위한 기초 세력이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운영해 나갔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 의거, 이어서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 공원 의거가 결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 경찰이 프랑스 조계에 들어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수색을 벌였다. 이에 김구안공근(安恭根)은 미국인 피치 박사의 집으로, 이동녕조성환·송병조·차리석 등과 함께 1932년 5월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7월 중국 관내의 주요 정당 및 단체들이 통합을 이루어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임시정부 국무 위원과 한국 독립당의 많은 인사들이 이에 참여하면서, 임시정부는 다시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때 이동녕은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김구·이시영·조성환·엄항섭 등과 한국 국민당을 조직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송병조·차리석·조완구·김구와 함께 국무 위원이 되어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수습하였다.

당시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좌우익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정치적 이념에 따라 여러 정당 및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이동녕은 중일 전쟁의 발발을 독립을 위한 좋은 기회라고 여겨, 좌우익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그 방법으로 우선 한국 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 진영의 한국 독립당과 조선 혁명당의 통합을 추진, 1937년 8월 이들 3당 및 미주 지역의 6개 단체가 연합하는 형식으로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5. 임시정부 주석에 선임

중일 전쟁으로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확대되자, 이동녕은 임시정부와 함께 피난을 다녔다. 가흥에서 남경으로 옮긴 후, 일본군이 남경을 공격해 오자 1937년 12월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7개월 정도를 머물다가, 1938년 7월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로 갔다. 광주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주강(珠江)을 거슬러 올라가 1938년 11월 광서성(廣西省) 유주(柳州)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5개월 동안 체류한 후, 1939년 5월 사천성(四川省) 기강에 정착하였다. 기강에 도착한 후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면서, 1939년 10월 25일 이동녕은 국무 회의에서 주석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이 국무 회의를 통해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확대해 나갔다.

이동녕은 1940년 3월 13일에 기강에서 72세로 숨을 거두었다. 임시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1948년 9월 김구의 명에 의해 김신(金信)이 이동녕의 유해를 모셔와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이동녕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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