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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86
한자 金馹孫
이칭/별칭 계운(季雲),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문민(文愍)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조항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64년연표보기 - 김일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86년 - 김일손 식년시 문과 갑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498년연표보기 - 김일손 사망
출생지 김일손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
사당|배향지 자계 서원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성격 학자|문신
성별
본관 김해
대표 관직|경력 홍문관 부수찬|사헌부 장령|사간원 정언

[정의]

조선 전기 천안에 우거한 문신·학자.

[개설]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흔히 사초에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어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거론된다.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의흥 현감을 지낸 김서(金湑), 할아버지는 효성이 지극하여 사람들에게 절효(節孝) 선생이라 불린 김극일(金克一)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집의를 지낸 김맹(金孟)이며, 어머니는 형조 참의를 지낸 이양(李讓)의 딸 용인 이씨(龍仁李氏)이다.

[활동 사항]

1486년(성종 17) 7월에 진사가 되고, 같은 해 11월에 식년시 문과 갑과에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게 되었다.

1487년 진주 향교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 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의 연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거쳐 홍문관 박사(博士)와 부수찬(副修撰)·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修撰)을 거쳐 병조 좌랑·이조 좌랑이 되었다.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및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조 정랑 등을 지냈는데,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를 하게 하던 일]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와 부패를 공격하며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에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의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로 말미암아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으며, 중종 때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都承旨), 순조 때 이조 판서가 각각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김일손이 천안과 연관을 맺은 것은 24세 되던 해인 1487년(성종 18) 4월에 첫 번째 부인 우(禹)씨를 잃고, 2년 후인 1489년(성종 20) 7월에 목천에서 김미손(金尾孫)의 딸 예안 김씨(禮安金氏)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목천[현 충청남도 천안시]에 연고를 두게 되었으며, 1492년(성종 23) 작성산(鵲城山) 계곡에 있던 작은 별서(別墅) 인근에 죽림 정사(竹林精舍)를 지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會老堂記)」·「속두류록(續頭流錄)」 등 26편의 글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김일손의 묘가 구두실 부근 동쪽 산20번지에 있었다고 하는데, ‘탁영 선생 지묘’라는 비를 1635년에 목천 현감으로 부임한 박순인(朴純仁)이 세웠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초 사방 공사를 할 때 없어졌다고 하며, 현재는 위치를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김일손 사후 죽림 정사도 사라졌는데, 훗날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만년에 강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죽림(竹林)’이라는 석각(石刻)을 발견하고 ‘죽림 정사(竹林精舍)’를 지었고, 이것이 나중에 도동 서원(道東書院)이 되었다. 도동서원에는 김일손정구를 배향하였고, 1649년에는 이 지역 출신의 황종해(黃宗海)를 배향하였다.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병천면에 걸쳐 있는 은석산의 남동쪽 계곡에는 도동 서원이 있었던 서원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개목’으로 불리다가 인조도동 서원이 들어선 후 ‘서원리’가 됐으며, 지금은 병천리에 편입되어 마을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김일손도동 서원 및 청도의 자계 서원(紫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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