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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62
한자 朴自凝
이칭/별칭 정길(正吉),읍백당(挹白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9년연표보기 - 박자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박자응 증광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8년 - 박자응 성균관 전적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20년 - 박자응 사헌부 장령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박자응 제주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28년 - 박자응 진도로 이배
몰년 시기/일시 1645년연표보기 - 박자응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밀양(密陽)
대표 관직|경력 사간원 헌납|사헌부 장령

[정의]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문신.

[개설]

박자응(朴自凝)[1589~1645]은 광해군 재위 시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인조반정 후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로 이배되었다.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정길(正吉), 호는 읍백당(挹白堂)이다.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사원(金士元)의 딸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활동 사항]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4년(광해군 6)에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고, 곧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친 뒤 1618년에는 비변사(備邊司)의 유장(儒將)으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이어 홍문관 부교리·성균관 직강·세자시강원 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이때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주도하여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폐출을 주장할 때, 신병을 핑계로 불참했다가 이듬해 고산 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1620년 영광 군수를 거친 뒤, 홍문관 수찬(修撰)·정자(正字)·교리(校理)·응교(應敎) 및 사산원 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는 제주로 유배되었고, 이재영(李再榮) 등의 공사(供辭)에 의하여 박자응의 급제가 남의 글을 베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급제가 취소되었다. 1628년(인조 6) 진도로 이배된 뒤 이듬해 위리(圍籬)만 철거되었다. 이후 벼슬길이 열렸으나 사양하고, 목천현 서면 말원(秣院)에 우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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