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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853
한자 趙銘
이칭/별칭 경부(警夫),인촌(仁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조항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조명 아버지 조순생에 연좌되어 금산에 안치
활동 시기/일시 1469년 - 조명 사면
몰년 시기/일시 1478년연표보기 - 조명 사망
거주|이주지 조명 이주지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신리
묘소|단소 조명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사당|배향지 장보사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사당|배향지 충렬사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한양(漢陽)
대표 관직|경력 병조 정랑

[정의]

조선 전기 천안 목천 지역에 우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자는 경부(警夫), 호는 인촌(仁村)이다. 태조의 배향 공신이며 개국 공신인 조인옥(趙仁沃)의 증손자이고,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조뇌(趙賚)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의를 지낸 조순생(趙順生)이고, 어머니는 사정 원유용(元有容)의 딸 원주 원씨(原州元氏)이다.

[활동 사항]

조명(趙銘)[?~1478]은 16세에 문과에 급제해서 관직이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아버지 조순생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과 합심하여 단종을 지키려 하다가 고성에 안치된 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조순생의 죄목은 “역당 안평 대군에게 아부하여 일야로 왕래하며 당여로 불괴를 꾀하였다.”라는 것이었다. 조씨 일가의 재산이 몰수되었고 자손은 모두 연좌되어 귀양을 갔으며 처첩은 권신가의 노비로 전락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조순생의 처는 처음엔 전 부사직 이몽가(李蒙哥)의 비복으로 삼았다가 후에 임자번(林自蕃)의 비복으로 주었다고 기록되었다.

조명은 아버지가 고성으로 귀양갈 때 연좌되어 금산으로 귀양을 갔다. 후에 조순생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귀양살이 중이라 아버지의 시신마저 거두지 못하였다. 아버지 조순생에게 사약을 내리고 어머니는 적몰[중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도 처벌하던 일]되어 권가의 노비가 되었으나 조명을 살려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조순생 일가의 16세 이상 남자는 모두 교수형에 처했는데 조명은 다만 귀양살이만 한 것이었다.

1469년(예종 1) 충청도 목천에 안치되었던 아들 조예(趙禮)와 함께 방면된 조명은 목천현 신기에 거처를 마련하였는데, 전부터 천안의 목천 땅과 인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명은 목천에 우거하면서 매일 아침 관복을 입고 홀을 들고 뒷산에 올라 단종이 잠들어 있는 영월을 향하여 절을 올렸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고성을 향해서도 절을 올리고 통곡한 후 집에 돌아왔다. 이렇게 하기를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이 몇 해가 흘렀다. 그러자 조명은 점점 쇠약해져서 끝내 요절하고 말았다.

조명이 매일 올라가 절하고 통곡한 산봉우리를 사람들은 ‘정랑봉(正郞峰)’이라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표준 지도에 산 이름을 정랑봉으로 기재하고 있다.

[묘소]

조명의 묘소는 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조병옥 생가 인근에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1470년(성종 1) 고신(告身)[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돌려받았으며, 1812년(순조 12)에 효자로 정려 되었고, 사후에 도승지에 추증되고 목천의 장보사(章甫祠)·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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