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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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泰耆 |
이칭/별칭 | 낙수(洛叟),죽리(竹裏),정희(靖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창열 |
[정의]
조선 후기 천안 군수를 역임한 문신.
[개설]
남태기(南泰耆)[1699~1763]는 천안 군수를 역임한 뒤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낙수(洛叟), 호는 죽리(竹裏),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할아버지는 남상훈(南尙熏)이고, 아버지는 의빈도사(儀賓都事)를 지낸 남근명(南近明), 어머니는 부사(府使)를 지낸 이만봉(李萬封)의 딸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큰아버지인 남달명(南達明)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1732년(영조 8) 정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병조 좌랑·정언(正言)·북도병마평사감(北道兵馬評事監)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 좌랑으로 재직 시 『속대전(續大典)』 간행에 참여하였으며, 1747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 뒤 동부승지 등을 거쳐 1753년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백마산 외성(白馬山外城)을 보수하고 둔전을 설치하였다.
1755년 대사간을 지냈으며, 소론(少論) 잔당에 의한 괘서 사건이 일어나자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 등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어 황해도 감사, 도총관, 병조·형조 참판, 한성부 좌·우윤 등을 거쳐 1762년 예조 판서 겸 내의원 제조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죽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