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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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자연 지리,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집필자 | 박지훈 |
[개설]
가장 처음 역사에 등장하였던 도살성(道薩城)이라는 이름부터 군사적 요충지의 의미를 담고 있었던 천안은 역사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지역이었다. 그중에서도 천안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알려진 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천안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고려 때인 930년(태조 13)이다. 고려 태조가 천안의 왕자봉에 올라 지세를 살폈는데, 이곳이 ‘오룡쟁주지세’로서 여기에 성을 쌓으면 천하[天]가 편안[安]해진다는 술사 예방의 말에서 ‘천안’이라는 지명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은 이곳을 천안부로 칭하고 도독을 두었다. 이렇듯 삼한 일통의 비원이 서려 있던 도시가 바로 천안이었고 이러한 천안의 역사적 상징성에서 고려 개국의 근원을 찾아 오늘에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풍수지리의 역사와 상징성]
약칭 풍수설·지리설이라고도 하는 풍수지리사상은 지형이나 방위를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시켜, 죽은 사람을 묻거나 집을 짓는 데 알맞은 장소를 구하는 이론이다. 한국 문헌에서 풍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탈해왕(脫解王)에 관한 대목에 왕이 등극하기 전 호공(瓠公)으로 있을 때, 산에 올라 현월형(弦月形)의 택지(宅地)를 발견하고 속임수를 써서 그 택지를 빼앗아 후에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백제가 반월형(半月形)의 부여(扶餘)를 도성으로 삼은 것도,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모두 풍수사상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삼국 시대에 도입된 풍수 사상은 신라 말기부터 활발해져서 고려 시대에 전성을 이루어 조정과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신라 말기에는 도선(道詵)과 같은 풍수 대가가 나와, 중국에서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하여 지리 쇠왕설(地理衰旺說)·산천 순역설(山川順逆說) 및 비보설(裨補說) 등을 주장하였다. 도선은, 지리는 곳에 따라 쇠왕과 순역이 있으므로 왕지(旺地)와 순지(順地)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지(衰地)와 역지(逆地)는 이것을 비보(裨補)[도와서 더하다]할 것이라고 말한 일종의 비기도참서(祕記圖讖書)를 남겼다.
고려 태조도 도선의 설을 믿은 것이 분명하여,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서, 절을 세울 때는 반드시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지덕(地德)을 손박(損薄)하지 말도록 유훈하였다. 개경(開京)[개성]도 풍수상의 명당이라 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궁예전(弓裔傳)」, 『고려사(高麗史)』「태조세가(太祖世家)」,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 이중환(李重煥)의 『팔역지(八域志)』, 송나라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명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등에도 개경의 풍수를 찬양하였다. 즉 개경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으로 내기불설(內氣不洩)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첩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국면(局面)이 넓지 못하고 또 물이 전부 중앙으로 모여들어 수덕(水德)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비보하기 위하여 많은 사탑(寺塔)을 세웠다.
[오룡쟁주지세와 천안]
천안의 지세는 북부와 서부가 대부분 구릉성 산지로 상대적으로 낮은 지대를 이루며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시가지는 동서남쪽으로 이어진 금북 정맥과 성거산을 주산으로 하여 태조산으로 이어지는 주산에서 왕자산을 진산으로 하고 있다.
시가지는 내외로 좌청룡, 우백호가 두루 갖춰진 형국이다. 오룡쟁주지세에서 이르는 오룡은 각기 전통적인 방위와 그에 상응하는 오방색을 따르며, 이에 다섯 마리 용은 동청룡, 남적룡, 서백룡, 북흑룡, 중앙황룡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를 천안의 지세에 적용하면, 남산은 여의주를 뜻하고, 동청룡은 장대산, 서백룡은 일봉산, 남적룡은 청수동의 수도산, 북흑룡은 천안 초등학교의 언덕을 각각 일컬으며 특히 북룡은 흑룡으로써 오룡 중 그 힘이 가장 강하고 또 크다 한다. 그리고 중앙의 황룡은 지금의 동남구청에서 중앙 초등학교로 뻗은 구릉을 지칭한다. 특히 황룡에 해당하는 중앙 초등학교는 과거 동헌이 자리 잡고 있던 곳으로써 황룡의 눈에 해당하는 자리이므로 그 기가 세서 민가의 터로는 알맞지 않고 관청의 터로써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오룡쟁주지세에서 여의주에 해당하는 남산에는 그 의미를 기리는 뜻에서 용주정(龍珠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예방이라 하는 인물은 풍수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예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존재치 않아 어느 고향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나 풍수지리에 밝아 전국 각지의 산천을 두루 살펴보았다 한다. 예방이 풍수지리에 매진하였던 데는 혼란한 난세를 극복하고 백성을 편히 이롭게 하는 데 중요한 땅을 찾아내려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때 예방은 현재의 천안에 이르러 동서로 관통하고 있는 현재의 금북 정맥[서운산-위례산-성거산-태조산-취암산-광덕산]을 두루 살펴보고 태조산에 올라 위례산, 성거산에서 서남방으로 뻗어내린 산줄기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봉우리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니 세 갈래의 산이 남북으로 뻗어있고 동서의 산줄기가 한 축을 이루어 마치 임금 왕(王)자의 형태를 띄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산이 바로 천안의 진산(鎭山)이라 일컫는 왕자산(王子山)이다. 예방은 왕자산의 능선이 서남방으로 뻗어 내려 회룡을 이루며 여의주[남산]를 다투는 형국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여기에서 오룡이 서로 여의주를 취하기 위해 다투는 오룡쟁주의 지세를 확인하게 되었고 이는 삼한 일통을 위한 최고의 명당이자 곧 길지임을 확신하게 된다.
예방은 이를 태조 왕건에게 고하고, 태조 13년(930년) 왕건은 예방과 함께 현재의 태조산에 올라 그 세를 두루 살피게 되니, 태조산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다. 태조는 여기에 성을 쌓으면 천하[天]가 편안[安]해진다는 술사 예방의 말에서 ‘천안’이라는 지명을 창안하고 도독을 두어 천안부를 설치하였다. 즉 왕건은 삼한 일통을 위해 전력을 다하던 당대에 핵심적인 사상이자 이론인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오룡쟁주지세라는 개념을 천안에 접목하여 지리적 요충지였던 천안을 새로운 국가의 발전과 경영의 큰 축으로 삼았던 것이다.
[오룡쟁주지세의 현재]
1. 수많은 천안의 ‘용’자 지명
이와 같은 영향으로 인해, 현재 천안시의 지명에 용(龍)자가 들어간 지역은 모두 50여 곳에 해당한다. 지명에 용이 들어간 곳은 쌍용동, 청룡동, 용곡동 등 동 지역 13곳과 성환읍 와룡리, 풍세면 용정리 등 읍·면 지역 37곳에 해당한다. 또한 1779년에 발행된 『대록지(大麓誌)』에 나타난 용연과 와룡동 9곳과 1852년에 발행된 『영성지(寧城誌)』에 나오는 용전, 두룡 등 8곳, 1899년에 발행된 『직산현지(稷山縣誌)』의 3곳 등 모두 20곳이었다. 이후 1913년에 발행된 『조선지지(朝鮮地誌)』에서 24곳으로 늘어난 데 이어 지금은 50곳에 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최근 국토 지리 정보원이 밝힌 충청남도 지역의 지명 가운데 용자가 포함된 지명 111곳의 절반에 달하는 것으로써 압도적인 분포를 보인다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오룡쟁주지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써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그 의미가 지금까지도 퇴색되지 않고 잘 남아 보존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증거이다.
2. 오룡쟁주 놀이
오룡쟁주지세와 관련하여 천안시에서는 오룡쟁주 놀이라는 각 동(洞)의 지세(地勢)에 얽힌 설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축제 형식의 놀이가 가을[음력 9월]에 행해진다. 이 놀이는 천안이 오룡쟁주(五龍爭珠) 형국(形局)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기 위하여 자웅(雌雄)을 겨루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남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마을이 오룡(五龍)에 비정되어 여의주를 다툰다. 경쾌한 농악에 맞춰 놀이가 시작되면 다섯 마리 용들은 붉은색 여의주를 차지하기 위해 입에서 불을 내뿜고 몸과 꼬리를 마구 흔들면서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다. 오룡의 다툼이 점점 격해지면 구경하는 주민들도 자기 마을의 용이 여의주를 빼앗도록 응원에 열을 올리는데, 그 함성과 풍물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바야흐로 오룡쟁주 놀이는 절정에 이른다. 이렇게 몇 차례의 세찬 싸움 끝에 상처를 입었거나 지쳐버린 용은 모두 그 자리에 쓰러지고, 오직 쟁탈전에서 이긴 최후의 용 한 마리가 여의주를 입에 물고 당당하게 운동장을 돌며 승리를 과시한다.
오룡쟁주 놀이의 유래는 서기 936년 9월 후백제의 신검(神劍)과 용검(龍劍) 설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치기 위해 8만 7000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천안에 주둔했을 때, 이 지역이 하나의 여의주를 놓고 다섯 마리 용이 싸우는 지세임을 알아냈다. 이후부터 천안은 오룡쟁주의 지세라고 불렸으며 오룡쟁주 놀이의 기원 역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유래담과 놀이는 사실 오랜 역사성을 지닌 전승놀이가 아니라 30여 년 전에 천안시민의 화합을 도모할 목적으로 각색·연출된 것이지만 지역의 설화와 풍수지리를 놀이를 통해 되새기고 계승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천안시민들이 고려 태조 왕건이 천안시를 천하의 명당이라고 극찬을 한 것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