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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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方五里洑 |
영어공식명칭 | Bangoribo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대장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철 |
최초 설립지 | 방오리보 - 경기도 부천시 대장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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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제방 |
[정의]
경기도 부천시 대장동에 있던 둑.
[명칭유래]
방오리보는 대장리에서 원종리까지의 둑 길이가 5리(五里)쯤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장동 새보둑 상류에서 원종동 방오리들까지의 거리가 대략 2.21㎞이다. 통상 5리(里)를 2㎞로 계산한다. 같은 들판을 두고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1] 하오정면 원종리(遠宗里) 조에는 영야(鈴野)[방우리들]라 기록되어 있다. 방오리보를 원종동 쪽에서는 ‘방우리들[鈴野]’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는 방오리보(方五里洑)의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고 ‘방울이보’로 불렀거나 기록하는 과정에서 방오리를 방울이로 잘못 알아들어 이렇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변천]
『조선지지자료』에 방오리보는 주화곶면(注火串面) 대장리(大壯里)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 보는 20여 년 전에 쌓았는데 지금은 내지인[일본인] 소유다[二十餘年前築現今內地人所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1890년(고종 27)을 전후한 시기에 쌓은 제방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인 소유가 되었고, 1970년까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구성]
1970년대에 제작한 지도를 보면 방오리보는 밖오쇠리마을 아래에서 시작해서 하오정교를 지나 대장분교 자리에 있던 솔오리를 지나고 대장 큰말까지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현황]
방오리보는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인에 의한 토지 점탈이 광범위하고도 조직적으로 자행된 사실을 확인하는 제방이라고 할 수 있다.
방오리보가 있었던 대장리의 학생들은 대장초등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방오리 둑방길을 걸어서 오정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현재 방오리보는 남아 있지 않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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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2 | 방오리보 | <참고문헌> <문헌><서명 검색어='부천시사'>『부천시사』</서명>(<출판사항>부천시사편찬위원회, 2002</출판사항>)</문헌> <문헌><서명 검색어='조선지지자료'>『조선지지자료』</서명>(<출판사항>경인문화사, 2007</출판사항>)</문헌> <문헌>한도훈,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부천문화원, 2001)</문헌> |
2010.12.16 | 방오리보 | 1) <지역>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대장동</지역> --> <지역>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대장동, 밖오쇠리</지역> 2) <상세정보 유형='주소'><지명 검색='1' 검색어='대장동'>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대장동</지명></상세정보> --> <상세정보 유형='주소'><지명 검색='1' 검색어='대장동'>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대장동, 밖오쇠리 마을</지명></상세정보> 3) <소표제>[정의]</소표제>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대장동'>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대장동</지명>에 있던 둑.</문단> -->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대장동'>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대장동</지명>에서 밖오쇠리 마을로 연결되어 있던 둑.</문단> 4) <문단><서명 검색='0' 검색어=''>『조선지지자료』</서명>에도 <지명 검색='1' 검색어='방오리보'>방오리보</지명>라는 지명이 나온다. <지명 검색='1' 검색어='방오리보'>방오리보(方五里洑)</지명>는 지금의 <지명 검색='0' 검색어=''>대장동 큰말</지명>에서 <지명 검색='1' 검색어='오쇠동'>오쇠동</지명> 앞들로 연결된 둑이다. 둑의 길이가 오리(五里)쯤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문단> <문단>1890년경 지금의 <지명 검색='1' 검색어='대장동'>대장동</지명> 지역에 물길을 대기 위하여 만들었으며, 둑길은 마찻길로 이용되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방오리보'>방오리보</지명> 중간에 <지명 검색='0' 검색어=''>오쇠교</지명>가 놓여 있었다. 현재는 도로와 들로 바뀌어 방오리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문단> --> <문단><서명 검색='0' 검색어=''>『조선지지자료』</서명>에도 대장리에 속하는 <지명 검색='1' 검색어='방오리보'>방오리보</지명>라는 지명이 나온다. <지명 검색='1' 검색어='방오리보'>방오리보(方五里洑)</지명>는 지금의 <지명 검색='0' 검색어=''>대장동 큰말</지명>에서 <지명 검색='1' 검색어='오쇠동'>오쇠동</지명> 앞들로 연결된 둑이다. 둑의 길이가 오리(五里)쯤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문단> <문단>1890년경 지금의 <지명 검색='1' 검색어='대장동'>대장동</지명> 지역에 물길을 대기 위하여 만들었으며, 둑길은 부평도호부에서 한다리를 거쳐 서울로 가는 마찻길로 이용되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방오리보'>방오리보</지명> 중간에 <지명 검색='0' 검색어=''>오쇠교</지명>, 하오정교가 놓여 있었다.</문단> <문단>1970년에 제작된 지도를 보면 <서명 검색='0' 검색어=''>방오리보</서명>는 <지명 검색='0' 검색어=''>밖오쇠리</지명> 마을 아래에서 시작해서 <지명 검색='0' 검색어=''>하오정교</지명>를 지나 대장분교 자리에 있던 <지명 검색='0' 검색어=''>솔오리</지명>를 지나고 대장 <지명 검색='0' 검색어=''>큰말</지명>까지 연결되었다. 대장 큰말 앞에서는 <지명 검색='0' 검색어=''>새보둑</지명>으로 연결되었다.</문단> 5) <참고문헌> <문헌><서명 검색어='부천시사'>『부천시사』</서명>(<출판사항>부천시사편찬위원회, 2002</출판사항>)</문헌> <문헌><서명 검색어='조선지지자료'>『조선지지자료』</서명>(<출판사항>경인문화사, 2007</출판사항>)</문헌> --> <문헌><서명 검색어='부천시사'>『부천시사』</서명>(<출판사항>부천시사편찬위원회, 2002</출판사항>)</문헌> <문헌><서명 검색어='조선지지자료'>『조선지지자료』</서명>(<출판사항>경인문화사, 2007</출판사항>)</문헌> <문헌>한도훈,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부천문화원, 2001)</문헌> |